청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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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광주시를 공부합니다.

광남동의 유래

 

행정동으로, 광주군이 시로 승격될 때 만들어졌다.

옛날, 광주면의 남쪽에 마을이 몰려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202012월 광남1, 광남2동으로 분동되었다.

 

1. 삼리(三里) 현 삼동

행내지곡(內地谷), 외지곡(外地谷), 소곡(小谷) 세 자연부락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이 마을을 '三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2. 내지곡(內地谷)

골짜기 안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이곳을 '안골' 또는 '내지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3. 외지곡(外地谷)

내지곡 마을이 생긴 이후 나중에 그 바깥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이를 '외지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4. 요곡ㆍ작은골

조선조 인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란 분이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남한산성에 딸린 땅을 포함한 골짜기 일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작은골'이라 하여 '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5. 중대리(中垈里) 현 중대동

이곳에는 고려 중기부터 광주 안씨가 집단부락을 이루어 살던 '텃골'(垈里)과 중말(中洞)이라는 두 마을로 통합하여 '중대리'라 부르게 되었다.

6. 중말

중대리'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말' '가운뎃말'이라 부르고 있다.

7. 텃골

옛날부터 집짓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해서 '텃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8. 직리(直里ㆍ곧은골) 현 직동

태봉산(胎峰山)에서 내려오는 곧게 뻗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곧은골'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直洞直里'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9. 새터

'곧은골'(直里)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 사람이 늘어나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10. 장지리(牆枝里) 현 장지동

1910년부터 담아, 앞가지, 뒷가지 세 마을을 합하여 장지리라 부르게 되었으니, 장내(牆內;담안)와 앞가지ㆍ뒷가지에서 한자씩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11. 담안(牆內)

주위에 있는 산이 마치 울타리처럼 둘려있다고 해서 '담안'(牆內)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2. 앞가지

장지리 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두 가지가 뻗쳐있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두 가지 가운데 앞가지가 뻗쳐있는 방향의 마을이라고 해서 '앞가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3. 뒷가지

위에 있는 나뭇가지 가운데 뒷가지가 뻗쳐있는 쪽의 마을이라고 해서 '뒷가지'라 부르게 되었다.

14. 절골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려시대에 장지리 3리에 절이 있어서 이곳을 '절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5. 목리(木里) 현 목동ㆍ나뭇골

오포읍에서 1973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면으로 편입된 마을로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나무가 우거졌다고 해서 '나뭇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木里'라 부르게 되었다.

16. 태전리(胎田里) 현 태전동

조선조 9대 임금인 성종의 태() 묻었다는 태봉산(胎峰山) 기슭에 형성된 마을인데, 이곳에는 또한 화전(火田)이 많다고 해서 태봉(胎峰)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 기슭에 발달한 부락을 '胎峰'이라 일컫게 되었다.

17. 태봉(胎峰)

조선조 9대 성종의 태()을 묻은 산이라 하여 이 산을 태봉산(胎峰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 기슭에 발달한 부락을 '胎峰'이라 일컫게 되었다.

18. 태외(胎外)ㆍ태바께

태봉마을 바깥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한자로는 '태외(胎外)' 고유어로는 '태바께'라 부르게 된 마을이다.

19. 옥동(獄洞)ㆍ옥텃골

조선조시대 죄수들을 가두어 두은 옥사(獄舍)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옥동' 또는 '옥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20. 띠야골

이곳에는 어린 순을 '뻘기'라고 하여 먹기도 하는 띄()가 많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이름 을 '띠야골'. '띠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기광주시명의 변천, 광주시명의 변천, 광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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